하라 켄야 Hara Kenya
"비어 있다는 건 모든 게 있을 수 있다는 잠재성을 내포합니다.
지평선은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지만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있는 장소입니다.
브랜드, 제품, 그리고 디자인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게 있고, 모든 게 있지만 텅 비어 있습니다."
지평선은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지만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있는 장소입니다.
브랜드, 제품, 그리고 디자인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게 있고, 모든 게 있지만 텅 비어 있습니다."
"디자인은 지능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감성과 통찰력이다."
하얗고 또 하얗다. 심플하고 또 심플하다. 하라 켄야의 디자인은 얼핏 극한의 미니멀리즘으로 보인다. 문양없이 좋은 디자인 브랜드 무인양품의 아트 디렉터가 바로 그다. 하지만 하얗고 심플한 이 남자의 디자인엔 기존과 다른 세상이 있다. 일견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그의 디자인 속에서 나온다.
하라 켄야의 디자인엔 정숙이 필요하.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는 소음을, 잡광을 잠시 소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익숙함을 낯섦으로 치환하며 세상을 바라보고, 지식을 무지로 돌리면서 디자인을 끌어낸다.
그래서 그에겐 사소한 차이가 중요하다. 디자인을 다시 디자인하는 리디자인(Re-Design), 우리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인식해야 한다는 개념의 엑스포메이션(Ex-Formation) 등 하라 켄야가 지금까지 보여준 일련의 작업들은 그 사소한 차이가 이뤄낸 전환의 결과들일 것이다.
하라 켄야는 달리 본다. 그리고 달리 봄으로써 보편 타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안한다. 일상에 대한 탐구, 디자인을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다. 더하기보단 덜어내기에서, 눈에 띄는 화려한 시각보단 다소 지루한 촉각과 청각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하라 켄야. 그는 우리에게 한 꺼풀 깊게 끼인 이미지와 디자인의 환상을 거둬내야 한다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과학 기술은 일상에 새로운 상황들을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의 디자이너들은 이 새로움뿐 아니라 익숙한 일상생활에도 무수한 디자인의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기묘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창조성이 아니다.
기묘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창조성이 아니다.
익숙한 것을 미지의 것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 감성 또한 창조성이다."
- [디자인의 디자인](2003) 중에서
국내에선 무인양품의 디자인 수장으로 익숙하지만 하라 켄야가 일본에서 주목받은 건 1990년대 그가 보여준 일련의 '리디자인' 작업들 덕분이다. 그는 '다시 디자인한다' 라는 개념에 주목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종이컵이 지금이 종이컵 모양이 아닐 수도, 볼펜이 지금의 볼펜 디자인이 아니어도 된다는 사실을 연출하는 배짱의 도전이었다.
그는 마카로니의 새로운 모양을 탐구하는 전시회 [건축가들의 마카로니]를 기획했고, 쌀 포대의 새로운 버전, 쌀 형태에 어울리는 패키지를 찾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기존의 것을 미지화하는 과정" 이었다. 그리고 2000년 4월에는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 32명에게 의뢰해 [리디자인-일상의 21세기]란 전시를 열었다.
이 전시에서 하라 켄야는 제품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에게 티백 제작을 의뢰했으며, 건축가 구마 겐고와 반 시게루에겐 각각 바퀴벌레 덫과 화장지를 맡겼다. "이전의 디자인과 다른 생각을, 시선의 차이를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으로 담아보자는 취지"였다. 그렇게 완성된 게 손잡이가 고리로 된 홍차 티백, 접착 테이프 형태의 바퀴벌레 덫, 종이 심이 사각형인 화장지다.
후카사와 나오토는 티백에 고리를 달고 그 고리를 홍차가 제일 맛있을 때의 색깔로 칠했다. 좀처럼 맞추기 힘든 홍차 티백의 농담 조절을 고려한 장치였다. 구마 겐고를 사각으로 조립이 가능한 테이프를 만들고 내부를 끈끈이로 처리했다. 포획된 바퀴벌레의 뒤처리를 배려한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반 시게루는 종이 심을 사각으로 만들어 휴지를 잡아당길 때 저항이 생기게 했다. 자원 절약을 위한 장치였다.
[리디자인-일상의 21세기] 전시는 일본에서의 호평은 물론 스코트랜드 글래스고, 덴마크 코펜하겐, 중국 상하이, 캐나다 토론토, 독일 베를린, 미국 뉴욕 등에서도 인기리에 열렸다.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게,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인식해나간" 일본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벗기기가 외국인의 눈에도 신선하게 보인 것이다.
일상의 디테일을 다시 보는 작업, 이것이 하라 켄야 디자인의 핵심이다.
무인양품
무인양품은 1980년 월마트의 일본 자회사 세이유가 시작한 생활용품 브랜드다. 그래픽 디자이너 다나카 잇코는 '노 브랜드 굿즈(No Brand Goods)'를 모토로 무인양품을 기존 브랜드의 안티 체제로 꾸려나갔다. 제품에서 브랜드 로고를 없었고, 화려한 장신을 다는 대신 소비자의 생활을 고려해 섬세한 기능과 디자인을 채웠다.
무인양품은 '깨진 표고버섯' 이란 이름의 상품을 내놓은 적도 있다. 잘게 썰어 조리하는 경우가 더 많은 표고버섯의 현실적인 레시피를 반영한 상품 개발이었다.
그리고 이 브랜드를 2001년 8월 하라 켄야가 물려받았다. 하라 켄야는 제품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와 함께 다나카 잇코의 자리를 뒤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좋다'고 목놓아 외치는 대부분의 브랜드와 달리 '이것으로 충분하다'를 브랜드의 이상으로 삼았다.소비자에게 새로운 기능, 새로운 편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이지만 잊혀진, 보편 타당함에서 결여되어 있는 부분을 채워나가자는 취지였다.
하라 켄야는 무인양품의 해외 진출에 맞춰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다. 비움(Emptiness)을 콘셉으로 한 이미지 작업이었다.
그는 하얀 바탕 위에 하얀 냉장고 사진을 덜컹 얹었고, 바탕 한 귀퉁이에 무인양품의 로고를 썼다. "기능을 더하고, 디자인을 더하면서 정작 물건에서 필요한 사소한 역할들은 간과됩니다. 오히려 물건을 기본으로 되돌리고 보편 위에서 생각할 때 보이지 않았던 역할의 가능성과 디자인의 틈이 보이죠."
하라 켄야에게 기본, 보편은 일차원적 만족을 주는 가치가 아니다. 그의 디자인엔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있어도 티를 내지 않는다.
하라 켄야의 대표작이자 무인양품이 해외 시장에서 주목을 끌게 된 화제의 광고가 있다. 바로 '지평선 시리즈'이다. 하라 켄야는 하늘과 땅이 맞닿은 남미의 어느 지평선 위에 무인양품의 로고를 얹었다. 안데스 산맥 중턱의, 해발고도 3700m에 위치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사진은 하얗고 파란 바탕에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 그리고 무인양품 네 글자가 전부다.
"비어 있다는 건 곧 모든 게 있을 수 있다는 잠재성을 내포합니다. 사진으로 찍은 지평선은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지만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잇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브랜드, 제품, 그리고 디자인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빈 그릇의 가치에서 시작하는 브랜드 무인양품은 이렇게 하라 켄야 디자인의 큰 축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게 있고, 모든게 있지만 텅 비어 있다. 무인양품의 하양, 하라 켄야의 여백이 얘기하는 메시지이다.
"엑스포메이션(Ex-Formation)은
정보를 뜻하는 영어 인포메이션의 'In' 대신 'Ex'를 붙여 만든 단어입니다.
정보 과잉의 시대, 모두가 알고 있다 떠드는 지금
사실 얼마나 우리가 모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저는 이 엑스포메이션 활동이
일종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면적인 활동이 아닌 내부의, 보이지 않지만 다른 차원을 가능케 하는 힘을 만들어준다는 거죠.
일상적인 것과 조금만 다른 동작을 취해봐도 평상시의 동작을 새삼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 동작의 본성을 감지하는 것이고, 그 감각은 사회 전체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극이 됩니다."
- 엑스포메이션 서울x도쿄 심포지엄
중
하우스 비전 프로젝트
그가 2011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하우스 비전(House Vision)은 무인양품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다. 생활용품부터 의류, 문구와 가구, 그리고 전자제품까지 일본인의 일상을 디자인하듯 물건을 만들고 있는 무인양품은 2004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무인양품이 얘기하는 새로운 생활의 그림이 물건 몇 개보단 공간의 제시를 통해 더 그럴싸하게 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라 켄야는 "공간 자체의 품질에 눈을 돌려야 한다" 고 말 했다. 그리고 그는 "주택 공간을 생활에 맞추어 편집한다는 발상으로 공간을 재구성해" 집을 지었다. 획일화된 구조에 사람이 맞춰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내용에 맞춰 집을 가꿔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집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어디에서도 창문을 열 수 있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고정된 파티션을 없애 다양하게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집이다. 둘이 살다 자녀가 태어나 가족 수가 늘고, 그러다 다시 노년이 되어 둘 혹은 홀로 되었을 때 무인양품의 집은 대응이 가능하다. 볕이 강한 날, 장마가 심한 여름, 그리고 찬 바람이 거센 겨울 등 계절과 날씨에 맞춰 이 집은 문단속을 달리할 수도 있다.
이렇게 무인양품은 지금까지 일본 전국에 958채의 집을 지었다. 그리고 매년 하우스 비전 전시를 통해 새로운 주거 공간의 가능성을 탐하고 있따.
하라 켄야는 주택을 '가능한 다음 산업' 이라 얘기했다. "에너지, 이동, 통신, 가전, 영상 등 다양한 분야의 산업이 집약되는 대상"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집 짓기는 무인양품의 프로젝트임과 동시에 하라 켄야 개인의 작업이 된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다음 산업의 가능성을 알기 쉬운 형태로 세상에 제시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만들고, 디자인을 통해 새로운 기능을 도출하는 일은 경제적인 수치로 바로 드러나겠지만 다음 산업, 다음 세계의 경제를 예측하고 제시하는 일은 당장 보이진 않아도 디자이너로서 해야 할, 필요한 작업이죠."
그는 "훌륭한 디자이너 한 명보다 디자인을 아는 대통령 한 명이 세상을 더 바꿀 수 있다" 고도 했다. 일상의 디자인 환경이 중요하단 말일 것이다. 기발함은 좋다. 새로운 것도 물론 좋다. 하지만 디자인은 결국 잘 먹고 잘 사는 데 도움이 되느냐이다.
하라 켄야 월드를 이해하는 키워드 5
1. 후카사와 나오토
2001년 하라 켄야와 함께 무인양품의 자문 위원으로 참여한 제품 디자이너이다. 보통 사람이 인식하지 않는 행동에서 착안한 디자인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환풍기처럼 생긴 무인양품의 벽결이형 CD 플레이어, 아이스 바의 모양을 한 au의 휴대전화 인포바, 그리고 이세이 미야케의 손목시계, 라미의 볼펜 노트 등이 있다.
2. 햅틱 Haptic
2004년 하라 켄야가 기획한 전시의 이름이다. 촉각을 의미하는 이 단어를 통해 하라 켄야는 오감을 각성케하는, 시각 의존에서 탈피한 물건의 디자인을 궁리했따. 건축가, 제품 디자이너 등 22명이 참여했으며, 털실로 만든 조명, 젤 타입의 리모컨 등이 소개됐다.
3. 하우스 비전 House Vision
새로운 주거 공간, 그리고 방식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이다. 하라 켄야와 무인양품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지금은 혼다, 다이와 하우스, 산토리, TOTO 등 일본의 주요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4. 디자인의 디자인
2003년 하라 켄야가 발표한 단행본의 타이틀이다. 그간의 디자인 작업을 모아 정리한 이 책은 리디자인 개념을 중심으로 한 하라 켄야 디자인의 충실한 참고서이다. 책 제목임과 동시에 하라 켄야 디자인 철학의 핵심을 표현한 문구이기도 하다.
5. 다나카 잇코
일본의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브랜드 무인양품을 발족했으며 2001년 하라 켄야가 자문 위원으로 참여하기 전까지 아트 디렉터 역할을 했다. 광고, 잡지 디자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따. 1964년 도쿄올림픽의 심벌 디자인, 일본의 생활잡화 숍 브랜드 로프트(Loft)의 로고 등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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